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平城宮跡 (헤이죠 큐세키 , 特別史跡)

平城宮 ( 헤이죠큐 ) 는 710 년 平城京 북부중앙에 약 동서 1.3km, 남북 1km 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. 이곳은 천황의 거처인 內裏나 국가의식이나 정치의 장이었던 大極殿 , 朝堂院 등 많은 役所가 늘어서있었습니다 . 지금으로 말하면 皇居와 霞ヶ 関 ( 카스미가세키 ) 의 官 庁 街를 합친듯한 곳입니다 . 平城宮 주변에는 높이 5m 의 築地塀이 에워싸고 있으며 , 각각 3 개씩 총 12 개의 문이 있습니다 . 남쪽의 정면중앙의 문이 주작문입니다 .

도시가 長岡京에서 平安京로 옮긴 후에는 이곳에 논으로 변해 오랜 시간동안 잊혀져왔습니다 . 江戶 ( 에도 ) 시대 말에는 大和古市奉行所에 근무했던 北浦定政 ( 키타우라사다마사 ) 의 실측연구에 의해 平城宮의 규모가 알려졌습니다 . 1900 년 奈良県 技師였던 關野貞 ( 세키노타다스 ) 가 大極殿 유적을 세상에 알리고 보전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. 이에 奈良의 정원수 상인인 棚田嘉十郞 ( 타나다카쥬로 ) 가 사재를 털어 보존운동에 힘썼습니다 . 그의 死後 22 년에 大極殿과 朝堂院 유적이 史跡으로 지정되어 다음해 국유지가 되었습니다 .

平城宮跡 발굴조사는 1954 년 북쪽도로 확장공사에 따른 긴급조사를 시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. 1959 년부터 나라 ( 奈良 ) 국립 문화재연구소가 본격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. 1962 년에 近 鉄 ( 킨테츠 ) 가 宮跡에 檢車區를 만들 계획을 세웠습니다 . 그러나 이곳은 일본최초의 木簡이 발견되는 등 이미 큰 성과를 거두었던 지역이였기에 전국적인 平城宮跡 보존운동이 일어나 1963 년 近 鉄 는 계획을 단념하고 宮跡 전역의 국비보조가 실현되었습니다 . 1966 년에도 宮跡 동부에 국도의 바이패스 계획이 구체화되었으나 , 이 역시 여론의 힘으로 宮跡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.

지금까지 宮跡의 3 분의 1 의 조사를 마쳤으나 , 宮跡이나 役所의 유적이 연달아 밝혀져 , 약 5 만점에 이르는 木簡을 시작으로 토기나 기와 , 생활용구 등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. 발굴조사가 진척될수록 平城宮跡이 세계적으로도 손색없는 地下遺構 , 역사의 보고임이 밝혀져 왔습니다 .

1998 년 봄 , 주작문과 東院정원이 복원되었습니다 . 현재 선명한주홍빛의 주작문은 마치 [ 빛으로 가득한 거리 奈良 ] 의 미래를 상징하는 양 드넓은 平城宮跡의 하늘아래 빛나고 있습니다 .

西大寺 ( 사이다이지 ) 北口行 버스 平城宮跡 하차

긴 역사와 윤택한 풍토가 키워낸 훌륭한 공예품 , 명산품들 .

토산물점 , 역사 싶은 가게에서 , 전통의 기술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공방에서 접할 수 있는 “ 역사의 얼굴 ” 입니다 .

 

東大寺 (토오다이지)

大佛은 奈良의 상징이며 , 그 大佛을 모시고 있는 곳이 東大寺 ( 토오다이지 ) 의 金堂=大佛 殿 입니다 .

불심깊은 聖武天皇 ( 쇼무천황 ) 은 부처의 자비로 정치불안을 해소해보고자 나라별로 國分寺를 건설하였으며 , 743 년에는 盧 舎 那 仏 의 제작을 명하고 전 국민에게도 이를 돕도록 호소하였습니다 . 이에 行基 ( 교키 ) 스님도 제자들을 거느리고 협력하였습니다 . 7 년 후인 749 년에는 대불이 완성되고 , 이어서 대불전도 완성되어 752 년에 개안공양 법회가 행하여졌습니다 . 공사는 그 후로도 이어졌지만 東大寺 ( 토오다이지 ) 건립은 나라의 총력을 기울인 대사업이었으며 , 그 가람 ( 절의 건축물 ) 은 전례없이 장대한 것이었습니다 . 남대문의 정면에는 중문과 회랑을 배치하여 대불전을 에워싸고 , 그 전방좌우에 7 층의 동탑과 서탑이 서있었습니다 . 대불전 뒤에는 승방에 둘러 쌓인 강당이 있었으며 , 동쪽에는 식당을 배치하였습니다 . 동쪽의 산에는 法華堂 ( 홋케도 ), 二月堂 ( 니가쯔도 ), 서쪽에는 戒壇院 ( 카이단인 ), 서북쪽에는 正倉院 ( 쇼소인 ) 이 있었습니다 . 동쪽을 제외한 서쪽 , 남쪽 , 북쪽을 토담으로 에워싸고 , 남쪽과 서쪽에는 3 개의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. 남쪽중앙이 南大門 , 서쪽 중에서도 가장 북쪽의 문이 転 害門 입니다 .

平安 ( 헤이안 ) 시대 이후에도 전국사원의 총본산으로써 세력을 유지하였으나 , 1180 년 平氏 ( 헤이시 , 타이라성을 가진 씨족 ) 의 공격으로 대불과 함께 대불전이 불타고 正倉院 , 法華堂 , 鐘 楼 , 転 害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堂塔 또한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. 그 후 重源 ( 쵸겐 , 鎌倉 ( 카마쿠라 ) 초기의 정토승 ) 을 중심으로 부흥사업이 이루어졌습니다 . 송나라 공인 陳和卿 ( 친나케 ) 의 협력으로 1185 년 대불을 복원하고 송나라로부터 大佛 様 이라는 새로운 건축양식을 들여와 95 년에 대불전을 재건하였습니다 . 4 년 후에 완성된 남대문은 이 大佛 様 을 지금까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. 1200 년에 새로이 開山堂 ( 카이산도 ) 가 세워지고 , 수년 후 종루가 호쾌한 구조로 새로 지어졌습니다 . 한편 法華堂은 남쪽의 예당을 大佛 様 으로 다시 세워 正堂으로 연결하여 균형잡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하였습니다 . 오미즈토리 ( お 水取 り ) 로 유명한 二月堂 ( 니가쯔도 ) 는 1667 년에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2 년 후 재건되었습니다 .

1567 년 , 松永久秀 ( 마쯔나가 히사히데 ) 와 三好三人衆 ( 미요시산닌슈 ) 와의 전쟁으로 인해 대불전과 戒壇院을 비롯한 수많은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. 그 후 스님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건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다가 1684 년 막부의 허가로 公慶 ( 코케 ) 에 의한 부흥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. 1692 년에 대불이 복원되고 1709 년에는 대불전도 재건되었습니다 . 奈良시민들도 大佛 講 을 만들어 시주하였습니다 . 그러나 대불전의 재건은 막부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경비가 충분하지 않아 창건 당시보다는 규모가 작아졌습니다 . 대불전의 정면 폭이 27m 정도 좁아지게 되었으나 그래도 세계제일의 목조건축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. 明治 ( 메이지 ) 시대 초기에는 지붕이 기울어지는 등의 심한 손상으로 인해 다시금 대대적인 수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나 , 明治 ( 메이지 ) 시대가 막을 내린 1909 년이 되어서야 공사에 착수하여 1913 년에 준공되었습니다 . 昭和 ( 쇼와 ) 시대에는 南大門이나 転 害門 등의 수리도 이루어졌으며 , 1978 년에는 대불전지붕의 기와 11 만장을 새로 바꾸는 공사가 완공되었습니다 .

近 鉄 奈良 駅 ( 킨테츠 나라역 ) 에서 도보 15 분

 

興福寺 ( 코후쿠지 )

猿沢池 ( 사루사와이케 ) 의 수면위로 비추이는 興福寺 ( 코후쿠지 ) 5 층탑 . 이 아름다운 모습은 奈良의 대표적인 풍경입니다 . 興福寺 ( 코후쿠지 ) 는 藤原 ( 후지와라 ) 가문의 鎌足 ( 카타마리 ) 死後에 幸福을 기원하며 건설한 山階寺 ( 야마시나데라 ) 가 飛鳥 ( 아스카 ) 에 옮겨져 廐坂寺 ( 우마야사카데라 ) 가 되어 平城遷都 ( 헤죠센토 ) 에서 移建되었다고 전해집니다만 , 사실은 鎌足 ( 카타마리 ) 의 아들 不比等 ( 후히토 ) 의 발원으로 氏寺 ( 우지데라 ) 로써 창건된 것입니다 . 中金堂은 만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官寺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. 그 후 北円堂이 721 년 , 東金堂과 오중탑이 726 년 , 西金堂이 734 년에 건설되면서 대부분의 가람이 정비되었습니다 . 그리고 813 년 平安 ( 헤이안 ) 시대 초기에 藤原 ( 후지와라 ) 가문의 冬嗣 ( 후유쯔구 ) 가 南円堂을 건설합니다 .

藤原 ( 후지와라 ) 가 세를 떨침과 동시에 興福寺 ( 코후쿠지 ) 도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. 가람 외에도 一 乗 院 , 大 乗 院 등의 子院이 생겼습니다 . 興福寺 ( 코후쿠지 ) 는 그 자체가 씨족신인 春日社 ( 카스가샤 ) 와 다름없음을 주장하며 春日社의 실권을 잡고 , 1135 년에는 若宮社 ( 와카미야샤 ) 를 세워 다음해부터 春日若宮おん祭 ( 카스가 와카미야 온마쯔리 ) 라는 의식을 시작합니다 . 興福寺 ( 코후쿠지 ) 는 東大寺와 多武峯 ( 토노미네 ) 를 제외한 大和 ( 야마토 ) 의 절과 신사를 末寺나 末社로 만듦과 동시에 大和의 토착무사들에게 승려의 신분을 주어 승병을 늘리는 일에 주력하며 大和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.

1180 년 平氏 ( 헤이시 , 타이라성을 가진 씨족 ) 의 火攻으로 堂塔은 모조리 소실되었으나 즉각적인 14 년간의 부흥사업으로 재건되고 1210 년에는 北円堂도 완성되었습니다 . 1143 년에 창건된 3 층탑도 鎌倉 ( 카마쿠라 ) 시대 전기에 재건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. 1411 년 東金堂과 5 층탑이 雷火로 소실되나 東金堂은 1415 년 , 5 층탑은 1426 년에 재건됩니다 . 이때부터 서서히 寺勢가 쇠락하나 , 江戶 ( 에도 ) 시대에는 막부의 보호에 힘입어 조금씩 寺勢를 회복합니다 . 1717 년 , 金堂의 화재로 東金堂 , 5 층탑 , 北円堂 , 3 층탑 이외의 대부분의 堂舍가 불타버립니다 . 西國 三十三所札所이라는 이유로 南円堂만은 거의 원래의 모습대로 재건되었습니다 . 메이지유신의 神佛분리로 興福寺 ( 코후쿠지 ) 는 한때 폐허나 마찬가지였습니다 . 1872 년 , 중심의 堂塔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의 堂舍나 土塀이 헐리고 5 층탑은 매물로 나오기까지 하였으나 , 1981 년 再興허가로 차츰 절의 형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. 1998 년부터 장대한 가람의 복원정리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.

近 鉄 奈良 駅 ( 킨테츠 나라역 ) 에서 도보 5 분

 

春日大社 (카스가타이샤)

오른쪽에 飛火野 ( 토비히노 ) 를 두고 石燈籠이 늘어선 表 参 道 ( 오모테산도 ) 의 동쪽으로 걸어가면 春日大社 ( 카스가타이샤 ) 의 남문에 이르게 됩니다 . 그 안에 御蓋山 ( 미카사야마 ) 를 등에 지고 울창한 나무숲에 쌓여있는 진주홍의 아름다운 신전 春日大社 ( 카스가타이샤 ) 가 있습니다 . 藤原氏 ( 후지와라 가문 ) 에 의해 이곳에 鹿島 ( 카시마 ) 로부터 武甕槌命 , 香取 ( 카토리 ) 으로부터 経 津主命 , 枚岡 ( 히라오카 ) 로부터 祖神天 児 屋根命과 比 売 神을 맞이하게 되고 , 768 년에 이 四座의 신들을 받들며 春日社가 성립됩니다 . 藤原氏의 氏社로써 생겨났으나 머지않아 국가에서 祭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.

平安 ( 헤이안 ) 시대에 신사는 지금과 같은 모양을 갖추게 됩니다 . 藤原氏은 물론 , 황실과 귀족의 春日詣 ( 카스가모우데 ) 가 번성하여 室町 ( 무로마치 ) 시대에는 足利 ( 아시카가 ) 장군도 春日社 에 참배합니다 . 春日社 로의 진출을 진행하였던 興福寺 ( 코후쿠지 ) 는 11 세기말 거의 실권을 쥐었습니다 . 1135 년에는 春日若宮社 ( 카스가와카미야 진쟈 ) 를 세우고 이듬해부터 온마츠리라는 祭를 시작하여 春日社 와의 一體化를 실현합니다 . 이 무렵부터 興福寺 ( 코후쿠지 ) 의 승병들은 春日社 의 神木을 모시며 누차 京都 ( 교토 ) 로 强訴합니다 .

鎌倉 ( 카마쿠라 ) 시대 이후 春日社 는 伊勢神宮 ( 이세진구 ), 石 清 水八幡宮 ( 이와시미즈 하치만구 ) 와 나란히 三社라 불리우며 국민들의 신망을 모으게 됩니다 . 온마츠리 ( 祭 ) 도 14 세기말경부터 大和 ( 야마토 ) 의 국가의 祭가 되어 , 이윽고 春日 신앙은 서민들간에 퍼져나갑니다 . 3,000 개의 참배길의 석등롱과 회랑의 처마끝에 매달린 등롱들이 당시의 시대상을 말해줍니다 .

메이지유신의 神佛분리로 興福寺 ( 코후쿠지 ) 의 지배에서 벗어나 1871 년에 官幣大社 春日神社가 되어 , 1946 년부터 春日大社 ( 카스가타이샤 ) 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. 남문으로 들어오면 정면이 幣殿과 舞殿를 이용한 神 拝 所이고 , 좌측은 直 会 殿 , 神 拝 所 앞 정원을 사이에 두고 한층 높은 곳에 중문이 있으며 그 내부에는 본전이 있습니다 . 본전은 동쪽으로부터 제 1 전부터 4 전까지의 四棟 모두가 春日造의 桧 皮葺입니다 . 鎌倉 ( 카마쿠라 ) 시대부터 20 년 간격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공사가 행하여 왔습니다 . 현재의 건물은 1863 년에 마지막으로 손을 본 모습입니다만 , 平安 ( 헤이안 ) 시대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. 明治 ( 메이지 ) 시대 이후로는 지붕수리를 중심으로 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.

시내순환버스 春日大社表参道 ( 카스가타이샤 오모테산도 ) 하차 도보 10 분

 

春日山原始林 (카스가야마 겐시린, 특별 천연 기념물)

오사카로부터 生駒 ( 이코마 ) 산 너머 동쪽 奈良로 들어오면 정면에 春日山 ( 카스가야마 ) 과 若草山 ( 와카쿠사야마 ) 가 보입니다 . 오른쪽은 울창한 수림을 자랑하는 春日山 ( 카스가야마 ), 왼쪽은 부드러운 잔디로 덮혀있는 若草山 ( 와카쿠사야마 ) 로 , 두 산의 모습은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.

春日山 ( 카스가야마 ) 의 최고봉은 花山 ( 하나야마 , 498 미터 ) 와 그 서쪽 봉우리 , 春日大社 ( 카스가타이샤 ) 의 동쪽으로 인접한 삿갓 형태의 御蓋山 ( 미카게야마 ) 입니다 . 이 2 개의 봉우리 근처에 천년 이상 사람이 손길이 미치지 않은 원시림이 있습니다 . 春日山 ( 카스가야마 ) 의 2/3, 약 300 헥타르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이곳이 바로 春日山原始林 ( 카스가야마 겐시린 ) 입니다 . 스기 ( 삼나무 ), 히노키 ( 노송나무 ) 식재림도 일부 있습니다 .

841 년 , 산에서의 수렵과 벌목이 금지되었습니다 . 御蓋山는 예로부터 神山이었으나 이 금령으로 말미암아 春日山 전체가 春日 社 의 神域이 되었습니다 . 그 후 春日山는 일본인의 자연관이나 春日 信仰 과 결부되어 성역으로 보호되어왔습니다 .

春日山 原始林에는 175 종의 수림과 598 종의 화초가 자라고 있습니다 . 또한 사슴 , 멧돼지 , 너구리 등 10 종의 동물들과 제주직박구리 , 올빼미 등 60 종의 새들 , 그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조개류 이외에도 1,180 종의 곤충들이 발견되었습니다 .

明治 ( 메이지 ) 시대 때 국유림으로 지정되었으나 1889 년에 奈良공원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, 1924 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. 1929 년도에는 관광버스가 다니기 위해 카스가 오쿠야마 주행도로 확장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. 이에 학자들이 자연파괴와 학술자료훼손을 이유로 반대운동을 일으켜 , 1930 년에 ‘ 가능한 現 상태를 유지보존하며 고풍적인 경관을 해치는 시설을 짓지 않는다 ' 는 것으로 합의되었습니다 . 1960 년 高円山 ( 타카마도야마 ) 자동차도로와 연결되어 관광개발이 원시림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보호되고 있습니다 .

 

元興寺(간고오지 , 極楽坊)

猿沢池 ( 사루사와이케 ) 의 남쪽 , 전통거리 奈良町 ( 나라마치 ) 에 元興寺 ( 간고오지 ) 의 極樂坊 ( 고쿠라쿠보 ) 가 있습니다 . 元興寺 ( 간고오지 ) 는 蘇我馬子 ( 소가노 우마코 ) 가 飛鳥 ( 아스카 ) 에 세운 일본 最古의 사원인 法興寺 ( 호코지 , 아스카데라 ) 를 平城京 ( 헤이죠쿄 ) 로 옮긴 것입니다 . 奈良시대 후반기에 가람이 거의 정비되었다고 보여집니다 . 남대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중문 , 오른편 ( 동쪽 ) 으로는 탑이 , 왼편 ( 서쪽 ) 으로는 小塔院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. 중문은 강당과 회랑으로 연결되고 안에는 금당이 있었습니다 . 강당 뒤 종루를 끼고 동서로 각각 2 개의 大坊과 小子房로 이루어진 승방이 있으며 , 그 뒤로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.

平安 ( 헤이안 ) 시대 중반부터 元興寺 ( 간고오지 ) 는 쇠퇴하고 정토교가 포교됨에 따라서 그 중심은 極樂坊로 옮겨지게 됩니다 . 極樂坊는 승방의 일곽이었으나 , 奈良시대에 智光 ( 치코 ) 가 화공에게 그리게 한 淨土曼茶羅가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. 平安 ( 헤이안 ) 시대 말에는 본당과 선실에 改裝되었으나 , 1244 년 본당이 동향으로 개조되고 선실도 개수되었습니다 . 極樂坊에서 운영되던 念佛講이 鎌倉 ( 카마쿠라 ) 시대에 한층 발전하여 , 極樂坊은 서민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.

1451 년 농민폭동으로 金堂과 小塔院 등이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. 極樂坊과 5 층탑 , 관음당은 무사했지만 불에 탄 자리는 농가가 진출하여 마을이 되어버렸습니다 . 이에 元興寺 ( 간고오지 ) 는 極樂坊과 5 층탑 ・관음당으로 이분화됬습니다 . 1859 년 5 층탑과 관음당의 화재로 오랜 역사를 지닌 건물은 極樂坊의 본당과 선실만이 남습니다 . 지붕의 일부에 飛鳥 ( 아스카 ) 法興寺로부터 옮겨진 것으로 추측되는 기와가 사용되어 , 지금은 극히 일부에서만 볼 수 있는 行基葺 ( 교키부키 ) 의 例를 보여줍니다 . 선실은 중앙을 戶口로 하는 승방형식입니다 .

近鉄奈良駅 ( 킨테츠 나라역 ) 에서 도보 10 분

 

藥師寺 (야쿠시지)

 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藥師寺 ( 야쿠시지 ) 동탑을 주제로 시로 읊은 佐佐木信綱 ( 사사키노부츠나 ) 의 노래입니다 . 藥師寺 ( 야쿠시지 ) 는 원래 天武天皇 ( 텐무천황 ) 의 發願으로 持統天皇 ( 지토천황 ) 이 藤原京 ( 후지와라쿄 ) 에 세운 것입니다 . 718 년 平城京 ( 헤이죠쿄 ) 에 옮겨져 , 원래의 藥師寺 ( 야쿠시지 ) 와 나란히 아름답게 조영되었습니다 . 동탑은 730 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. 당시의 가람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. 남대문으로 들어오면 중문이 있으며 , 중문과 강당을 연결하는 회랑이 있습니다 . 회랑내측에는 금당이 있으며 , 동쪽과 서쪽에 탑이 서 있고 , 회랑 밖 강당 북쪽에는 식당과 식전 , 그 양쪽으로는 승방을 배치하여 강당과의 사이에 좌우로 종루와 경장이 있었습니다 . 그 조화로운 아름다움은 용궁에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.

973 년 食殿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금당과 東西의 탑 이외에도 거의 모든 堂舍가 소실되었습니다 . 그 후 재건하여 鎌倉 ( 카마쿠라 ) 시대에는 동탑의 동남쪽에 東院堂도 세워졌습니다 . 1528 년 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금당 , 강당 , 서탑 , 중문 , 승방이 소실되고 동탑과 東院堂만이 남았습니다 . 1545 년 仮金堂을 세우기 시작하여 1852 년에 완성되었지만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. 1971 년부터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, 푸른빛과 붉은빛이 선명한 금당 , 서탑 , 중문 , 회랑이 완성되어 현재의 강당이 지어집니다 . 이에 비해 창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동탑은 , 고색창연하고 차분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. 3 층탑이지만 각 층의 차양모양의 지붕 때문에 마치 6 층처럼 보이는 리드미컬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. 上輪 상부의 水煙은 하늘에서 춤추는 천녀와 동자를 투조한 4 장의 동판으로 이루어져있는 걸작입니다 . 東院堂은 1285 년에 세워진 것으로 , 1733 년 남쪽에서 서쪽으로 바뀌었습니다 .

近 鉄 西ノ京 駅 ( 킨테츠 니시노쿄역 ) 에서 도보 1 분

 

唐招提寺(토오쇼오 다이지)

唐招提寺 ( 토오쇼오 다이지 ) 는 당나라 고승 鑑眞이 759 년에 세웠습니다 . 鑑眞은 중국 당나라 揚州 , 大明寺의 스님이었지만 741 년 55 세가 되는 해 , 계율을 전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왔습니다 . 다섯 차례나 渡航에 실패하고 실명까지 하게 되지만 , 鑑眞은 단념하지 않고 여섯 번째 시도 끝에 겨우 일본에 건너와 754 년 奈良에 정착합니다 . 東大寺에 戒壇을 설치하여 聖武天皇 ( 쇼무천황 ) 이하 400 여명이 계율을 받들어 , 西ノ京에 新田部親王의 舊家를 하사하여 세운 것이 이 절입니다 . 平城宮의 朝集殿을 옮기고 우선 강당이 세워졌으나 , 금당 건립은 鑑眞이 세상을 뜬 후 奈良시대에 와서야 끝나게 됩니다 . 810 년에 5 층탑도 세워지고 가람이 정비됩니다 .

平安 ( 헤이안 ) 時代 말에는 꽤나 쇠퇴하였으나 , 鎌倉 ( 카마쿠라 ) 時代에 들어서서는 覺盛이 律宗의 거점으로 부흥했습니다 . 1275 년에는 강당수리 등도 이루어졌습니다 . 전쟁이나 화재도 없이 잘 전해 내려오다가 1802 년 雷火로 5 층탑을 소실하게 됩니다 .

鎌倉 ( 카마쿠라 ) 시대의 遺構로는 금당 , 강당 외에도 寶藏 , 經藏이 있습니다 . 금당은 奈良시대의 금당으로는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며 , 강당 또한 鎌倉 ( 카마쿠라 ) 시대에 외관을 조금 손보긴 했지만 平城宮의 殿舍 중 현존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.

近 鉄 西ノ京 駅 ( 킨테츠 니시노쿄역 ) 에서 도보 5 분